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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알리기 마당

춘궁리 5층석탑(보물 제12호)

춘궁리 5층석탑(보물 제12호)
  • 소개 :

    춘운동 3층 석탑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7.5m이고 2층의 기단과 5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탑도 몸돌 비율이 상층에 이를수록 급속히 줄어들고 있으며, 1층 몸돌이 2단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날렵하고, 경쾌하여 신라 석탑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 466번지

춘궁리 3층석탑(보물 제13호)

춘궁리 3층석탑(보물 제13호)
  • 소개 :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 석탑으로 높이3.6m이며 2층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석탑은 각 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큰데 비해서 2층과 3층은 현저히 줄어들고, 지붕돌도 이에 비례해 줄어들었다. 이러한 급격한 체감비율은 다른 탑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매우 안정감이있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그대로 이은 정사각형의석탑으로 조성 연대가 고려 중기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1966년 보수 공사때, 탑 안에서 납석제 소탑들이 출토되었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 466번지

태평2년 명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태평2년 명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 소개 :

    높이가93m로 큰편은 아니지만 삼각형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서 조각술이 정교하고 불신의 비례도 훌륭하다. 왼손에 약 그릇을 들고 있어 불상의 이름이 약사불임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왼편에는 “태평이년 정측 칠월이십구일 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황제만세원”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태평2년(977) 정측 7월 29일에 옛 석불이 있던 것을 중수하오니 지금 황제의 만세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이다. 옆에는 조그마한 폭포(객산폭포)와 약수터가 있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466번지

미사리 선사유적지(서적 제 269호)

미사리 선사유적지(서적 제 269호)
  • 소개 :

    남북 1,470m, 동서20~40m의 규모로 1962년에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문토기시대, 원삼국시대 백제시대 등 여러시대에 걸친 문화유적이 층위를 이룬채 발견되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유적이다. 특히, 청동기시대층에서는 다량의 무문토기와 함께 당시의 집터가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층에서는 다량의 빗살무늬토기, 어망추, 석촉, 석부 등의 생활도구와 탄화 도토리가 채집되었으며 국내 최초로 백제시대 밭이 대규모 발굴되어 우리나라의농경기술 발달사 및 관련분야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미사동 557번지 일원

춘궁동 동사지(사적 제352호)

춘궁동 동사지(사적 제352호)
  • 소개 :

    고려 초기에 창건된 거대 규모의 절터로서, 금당 규모가 경주 황룡사 금당에 필적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1988년 발굴 작업 시 ‘동사’라는 이름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금동불상과 막새기와, 동으로 만든 불기류 및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지름5.1m의 8각 구조물과 건물터 등 유구의 상태, 건축양식 또한 독특하여 건축사 및 한국불교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탑산골길 27(춘궁동 산41번지 일)

이성산성(사적 제422호)

이성산성(사적 제422호)
  • 소개 :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의 이성산(표고209.8m)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4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6~7m, 둘레는 1.84km의 규모이며, 주봉을 중심으로 하며 자연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부정형의 오각형에 가깝디. 성곽과 당시 사용되어 온 저수지 및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정상에는 왕이 제를 지내던 9각과 8각의 건물지가 있다. 특히 6각 건물지는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다. 건물지와 성벽에서 출토되는 토기, 기와, 무기류 이외에도 저수지 발굴을 통하여 다양한 생활도구가 출토되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 일원

광주향교(문화재자료 제13호)

광주향교(문화재자료 제13호)
  • 소개 :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 숙종29년(1703년)에 이성산성 아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 서당에서 공부한 15세이상의 양반자제를 교육하던 시설로써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단, 동무, 서무를 비롯한 6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 송나라와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광주향교는 지금의 수원, 화성, 의왕, 성남, 광주, 강동, 강남, 송파까지 관장하던 전국에서 제일 큰 향교였다고 한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 466번지

상사창동 연자방아(문화재자료 제82호)

상사창동 연자방아(문화재자료 제82호)
  • 소개 :

    마을 사람들이 둘러 모여 방아를 찧던곳.. 이제는 추억속으로 …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자매’, ‘돌매방아’라고도 한다. 방아틀에 연결된 돌을 말과 소가 끌어 돌림으로서 곡물 껍데기를 벗기거나 밀을 빻았던 것으로, 농촌에서 널리 사용되던 농기구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 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위가 잘 맞닿도록하여 뱅뱅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 연자매는 곡식을 찧고 빻는 일 외에 연자매를 둘러싼 연자매계의 계원끼리 서로 돕는 강력한 협동의 기능도 하였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설치하여 사용해 왔으나 현재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보존관리 하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춘궁동 466번지

법화사지 및 부도(문화재자료 제86호)

법화사지 및 부도(문화재자료 제86호)
  • 소개 :

    조선중기(17세기)의 절터로 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 태종의 매부 양고리 장군이 조선 원두표 장군의 계략에 의해 이곳에서 전사하였는데 후일 청태종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 법화사지에는 초석 일부와 화강암의 석탑조각들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석탑조각은 옥개석 부분인데,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절터 아래쪽 30m 지점에는 발처럼 약간 평평한 터에 3기의 부도가 서 있다.

  • 위치 : 하남시 상사창동 산97번지

밀성군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2호)

밀성군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2호)
  • 소개 :

    밀성군(1430~1479)은 조선조 세종의 다섯째 서자로 이름은 침이다. 자는 문지이고 어머니는 신빈김씨이다. 신도빈란 대개 무덤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라는 말은 사자의 묘로,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능, 원, 묘의 차이점은 조선시대 묘제에 있어 왕실의 묘는 능,원,묘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사친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정하였다.

  • 위치 : 하남시 초이중앙길 99-1(초이동 319-5번지)

사충서원 및 묘정비(향토유적 제3호)

사충서원 및 묘정비(향토유적 제3호)
  • 소개 :

    신임사화 때 희생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대신을 제향하기 위해 1725년(영조1년) 과천 노량진(지금의 노량진역)에 설립된 서원이다. 이들은 영조를 옹립하려다 소론의 무고로 모두 사사되었던 사람들인데, 영조는 즉위하자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서충서원을 건림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1727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다시4대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서원도 철폐하였다. 그 후 1740년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었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하다가 1756년에야 복설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충서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하게 되어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 용산규 보광동)으로 이건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중건하였다.

  • 위치 : 동수막길 37 (상산곡동 100-2번지)

구산성지(향토유적 제4호)

구산성지(향토유적 제4호)
  • 소개 :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거북 구 자와 뫼 산 자를 써서 구산이라고 불리는곳에 103위 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 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힌 성지가 있다. 구산성지와 구산성단은 조경이 뛰어나 드라마, CF, 영화촬영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카톨릭 신자와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특히 구산마을은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순교자 묘소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200여년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지켜가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망월동 387-12번지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
  • 소개 :

    교산동 건물지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건물지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오던 중 1999년부터 2002년에 걸쳐 기전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유규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조선시대에 결쳐 장기간 사용되었던 건물지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 말기 유물에서 조선시대 유물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중 건물지의 성격과 관련된 ‘관’ ‘광주객사’ 등의 각종 명문와 를 비롯하여 상품 백자 및 제기들이 출토되었다. 검단산의 한 줄기인 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건물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대형 건물지가 ‘ㄷ’자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외곽으로 토루가 둘러싸고 있다. 유적의 성격은 일단 고려시대 광주의 주치와 관련된 관영건축물로 추정된다.

  • 위치 : 하남시 교산동 78-3번지 일원

운산군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

운산군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
  • 소개 :

    운산군 이계(1453, 단종1~1510, 중종5)은 밀성군 이침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자는 신용,시호는 공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세조가 직접 사서와 경서를 가르쳤다. 1464년(세조10)에 운산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흥록대부, 흥록상전 종부시의 도제조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12)중종반정 때에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 의 호를 받았다. 1509년(중종4) 6월 종친부.종부시.사옹원의 제조가 되었다. 첫째부인 주부 곽득륜의 딸과 재취 김제군수 정자숙의 딸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는데, 첫째아들은 칠성군 이갱, 둘째 아들은 고성군 이강, 셋째 아들은 광성부정 이전이다. 큰딸은 파천군 윤탕노에게, 둘째딸은 창봉조신충에게, 셋째 딸은 유학 송세영에게 시집갔다. 1518(중종13)4월28일 남곤이 찬한 신노비가 세워졌다.신노비는 높이 300m, 폭 82cm, 두께 23cm 이다.

  • 위치 :하남시 초이동 산 4-1

광주이씨 시조비 묘역(향토유적 제7호)

광주이씨 시조비 묘역(향토유적 제7호)
  • 소개 :

    인화이씨는 광주이씨의 시조인 이당의 부인이다. 이당은 고려말 국자감생원을 지냈고, 조선조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자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이씨부인과의 사이에 인령, 원령, 희령, 자령, 천령, 등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특히 둘째 아들 원령은 둔촌 이집으러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를 지냈는데, 고려시대 삼은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 포는 정몽주, 도는 이숭인 등과 교류를 하였고, 학문에 있어서 명성이 높았다. 후손 가운데 조선조 문과급제자가 186명에 달하며, 이극배, 이준경, 이덕평 등 상당수가 영의정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10)갑자사화때에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1754년(영조30)에 14대손 창하가 이곳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견하여 지금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이 묘역은 600년 이상된 묘소로서, 옛 광주군의 토성인 광주이씨문중의 시조비라는 하남시 여우산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풍수상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 위치 : 하남시 덕풍동 산 24-1

유홍신도비(향토유적 제8호)

유홍신도비(향토유적 제8호)
  • 소개 :

    유홍은 증 영의정 유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증 사복시정 남충세의 딸이다. 1549년(명종4)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삼사를 거쳐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안 등 5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에는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광국일등공신으로 기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시종하고, 도체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다. 왜군이 후퇴하자 먼저 서울로 올라와 관아와 도성을 정리한 공으로 1594년(선조27)좌의정을 제수 받았다. 슬하에는 대술,대건,대진,대일 등 4남과 2녀를 두었다. 시문에 능했고 장서가 많기로 유명하다. 호는 송당, 본관은 기계, 시호는 충목이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송당집이 있다.1813년(순조13)에 세워진 신도비는 이조판서 장유가 짓고, 자손인 유한지가 썼는데,예서체는 서예가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찬사를 받고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대석위에 신석을 세우고, 비두에 개석을 얹고 있으며, 높이는 167cm, 폭 60cm, 두께 54cm이다.

  • 위치 : 하남시 하산곡동261

신성군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9호)

신성군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9호)
  • 소개 :

    선성군 묘역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 이무생과 그의부인 정씨, 김씨, 한씨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병산군,지산군,풍상부령,이원군,대구도호부사 이준도,동복공 등 선성군파 종문10여기의 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선성군 이무생은 1425년(세종7)중직대부 정윤, 1432년(세종14)원윤의 작호를 받았으며, 1454년(단종2) 중의대부 선성군에 봉군되었고, 1872년(고종9)에 상보국승록대부 영종 정경으로 추종되었다, 시호는 양정이다, 선성군 묘역에는 선성군 신도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묘갈, 장명등, 상석, 혼유석, 양석, 망주석, 동자상, 고석, 향로석, 문인석 등 수많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선성군 신도비의 비문은 이명상이 짓고, 윤용구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민병석의 솜씨이다. 또한, 이준도의 묘갈은 유근수가 비문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써 더욱 돋보인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왕자 묘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이곳의 석물들은 조선시댜 석물의 변천과 형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 위치 : 하남시 덕풍1동 산64

춘궁동 동사지(사적 제352호)

현민 유진오박사 생가터(향토유적 제10호)
  • 소개 :

    현민 유진오박사(1906-1987)생가는 60년 전에 멸살되어 현재 집터만 남아있다. 마을사람들의 전언이나 대지입지 여건상 중부지방의 전형적인‘ㄱ’자형 민가이며 5칸 규모의 동향 초가집으로 추정된다. 북족 담은 흙담이고 서쪽과 동남쪽 담은 싸리담으로되어 있었으며. 안채의 전면과 대칭형태였던 대문은 싸리문이었다고 한다. 집 동북쪽에 화장실이 담과 맞다있었고, 우물은 현재 남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 위치 : 하남시 상산곡동 512-2, -5(일명 섬말)

세양공 박강의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1호)

세양공 박강의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1호)
  • 소개 :

    박강은 조선정기 문싱으로 본관은 반남이고 1406년(태종6)좌의정을 지냈던 박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44년(세종26)에 대호군에 임명된 후 군기강정, 공조참의를 지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황해도도절제사, 이듬해에는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강원도관찰사,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1455년(세조1)에는 세조가 즉위 하는데 협력한 공으로 추충좌익공신 동지중추원사 금천군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도 선정되었다. 1457년(세조3)에는 지중추원사가 되었고 1460년(세조6) 왕을 호종하다 순직하였다. 시호는 세양이다. 인종 때 증손녀인 인성왕후의 추은으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취도충부도총관에 추증되었고 그의부인인 통진현부인 순흥안시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현대 묘역에 조성되어 잇는 석물들 중 박감 묘표, 순흥안씨 묘표 및 문인석 4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석조미술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 위치 : 하남시 초이동 산 5번지

하남시민 축제 주간행사

하남시민 축제 주간행사
  • 행사일시 : 매년 9월 22일 ~ 9월 28일 (1주일간)
  • 행사장소 : 시청광장, 하남문화예술회관, 종합운동장 등
  • 행사소개 :

    시1989년 광주군 동부읍에서 시로승격 된 후 시민의 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매년 하남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오다가 하남의 지역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축제명칭을 공모하여 초기백제의 도읍이라 주장되는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성”의 이성을 빌어 2003년부터 이성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오고 있으며 주요행사로는 국악공연, 무용, 클래식기타, 밸리댄스, 시립합창단공연 및 미술대전, 박물관 특별전, 음악회, 거리예술제등 다양한 예술 문화 행사가 일주일간 개최되며 마지막날 시민이 화합할 수 있는 『시민한마음 페스티발』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하남 이성무용제

하남 이성무용제
  • 행사일시 : 매년 7월 개최예정
  • 행사장소 : 하남문화예술회관
  • 행사소개 :

    하남의 문화예술발전과 시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하여 매년 개최하는 행사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하남의 대표적인 산성인 “이성산성” 문화재의 명칭을 사용한 이성무용제로 전국에서 우수한 예술적 능력과 경쟁력을 갖춘 우수한 무용인들의 대결의장으로 호평이 나있는 무용제로 발전해나가고 있는 행사입니다.

샘 재

샘재마을은 샘이 있는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 샘재와 바깥 샘재마을이 있다. 동경주 고개를 넘어오면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을 바깥샘재 마을이라 하고,
안샘재 마을은 샘재 안쪽에 있는 마을로서 교산동을 가르킨다.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동경주

경기도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 에는 동쪽에서 제일 큰 고을이라서 동경주로 불렀다고 하고,
『하남의 역사』에서는 동강난 쥐봉으로부터 동강난쥐 →동강쥐→동경주로 변화하였다고 쓰고 있다.
어떤 지도에는 동정두로 표기된 것도 있는데, 『함평 이씨 포장공파보(捕將公派譜)』에는 이곳을 동정(東亭)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사무소 등이 있었다.
지형으로 볼 때 객산 자락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선린촌(善隣村)

동경주에서 작은 야산을 돌아 내려가면 선린촌교회가 나오는데, 그 일 대의 마을을 선린촌이라 한다.
강동구 길동에서 양계를 하며 살던 실향민들이 1960년대에도 도시계획에 밀려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봉학골

선린촌을 지나 광주방향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이 봉학골이다.
산골짜기의 형세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봉학골이라 불렀다.
봉학동(鳳鶴洞)이라 표기된 묘비도 있고, 『함평 이씨 포장공파보』에도 봉학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의 상불사 아래쪽에 어느 부잣집의 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묘자리는 좌청룡 우백호가 완연하고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의 지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묘터는 아들들은 잘되고 딸들은 잘 살지 못하는 터였다고 한다.
출가한 딸들은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아들들은 더욱 부자가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딸들이 여기 저기 알아보니
아버지의 묘자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들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묘자리를 이장(移葬)하도록 요구하였으며
아들들과 몇 차례 상의한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는데, 이장을 하기 위해 묘를 파니 학이 날아 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고 난 뒤 아들들은 점점 가세가 기울었고 딸들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신장리

예전에는 장예말 외에는 마을이 없었는데, 신장시장이 생기도 장터말과 석바대마을이 형성되면서 새로생긴 장예말이라 하여 신장례라고 불렀다.
신장례 마을을 줄려 신장이라는 법정명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이 형성되면서 새로 길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길을 신작로라 했다.
따라서 어원변화로 인해 신작로-신장로-신장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바대

석바대는 바댕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장마가 들면 덕풍천까지 한강물이 범람하여 덕보교 근처가 포구가 되자 창모루 쪽의 바댕이를 바깥바댕이라 했으며, 덕보교 근처를 속바댕이라 하였다.
이 속바댕이가 어원변화로 인해 석바대로 변화된 것이다.

장예말

장예말은 덕풍천의 물을 이용하는 수리안전답으로서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다.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장리살을 놓았기 때문에 장리말.장례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새 말

새말은 석바대와 장례말 사이에있는 마을로 석바대와 장터말에 집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신장동 지명유래

신장동에서 제일 오래된 부락은 장예말이다. 장례말은 들판의 한가운데 있고 덕풍천의 보가 설치되어 비교적 기름진 농토가 있어 부농들이 살아
그 근처 마을 사람들이 쌀을 맣이 꾸어 먹었고 이것을 장리로 갚았는데 이쌀을 장리쌀 또는 장예말쌀이라 하고 장예쌀을 주는 마을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 밖에 신작로가 뚫이고 이것이 신장예마을이다. 그 지병이 간략하게 붙여져서 신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이것이 법정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신장동은 부락이 자꾸 늘어나 장예발과 석바대, 장터말을 합쳐서 행정구역 신장1동이 되고 신장2동은 신평리, 더우개, 아랫말, 동촌말, 개울건너말들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현재에는더우개 일부분과 동촌말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더우개

한강변에 있는 마을로 수운시대에 물물교환을 하던 포구가 있었는데 이 포구 이름을 덕오포라 하였다.
포의 우리말이 ‘개’를 붙여 ‘덕오개’라 하였으니 이 말이 변하여 ‘더우개’라 하게되었다.

신 정

더우개 부락을 일명 신정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은 그 근거가 구전이나 속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 부락을 형성한 사람들이 당정선에 살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이곳으로 이주한 배천조씨들의 주죽을 이룬다. 당정섬에 살다 온 사람들이 새로운 당정을 이루었다 하여 신정이라 한 것이다.

신평리

새뜰이라고도 한다. 한강병에 있는 마을로 원래 억새풀로 덮인 황무지 였다가 수리조합이 생김으로 옥토가 되어 새뜰이란 이름이 붙었고 당정리 사람들이 출입농을 하던 농토가 있는 곳으로 한집 두집 이주하여 생긴 부락이다.

덕풍동

통일신라시대 고공에 정이 설치되고 이 정의 명을 전달하는 역이 이곳에 있었는데 그 역명이 덕봉역이었다.
‘덕봉’이 변하여 덕풍이라고 되었다 한다. 지명에는 주민의 소원이 담기기도 하는데 이곳엔 마르지 않고 계속 흐르는 샘물이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이어지니 덕풍골이라 하여 생간 지명임이 정설이다.
덕풍동은 옛낳에 온천부락까지 였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부락이 풍산동으로 합치고 지금은 덕품골, 역말, 독점말, 개사리로 형성된 덕풍1동과 수리골, 송정골, 말바위굴청, 안터골로 형성된 덕풍2동 진모루, 범재고개, 한배미뚝, 흙새기, 골안, 옥다리, 나룰, 방(충)탱이로 형성된 덕풍3동의 행정동으로 구분된다.

옻 우물

약수터인 옻우물은 지금의 덕풍골 약수터를말하는데 오래전부터 이 옻우물은 옻오른 사람이 이 물에 몸을 씻고 마시며 깨끗이 낫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우물은 샘이 사시사철 솟아나와 주의 사람들의 식수와 그 밑의 논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현재는 한솔아파트 신축으로 많은 논이 줄어들었지만...

수리골

수리골은 이 마을 뒷산의 형태가 마치 수리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하여 취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수리는 조선시대 각 지방 관아의 여섯아전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으로, 이방아전을 일컫는 말이다. 즉, 이곳이 수리였던 사람이 살던 곳이라 수리골이라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주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43번 국도를 중심으로 북동쪽이 안 수리골이고, 남서쪽이 바깥 수리골이다.

봉바위

수리골 뒷산 정상에 올라서 보면 두 개의 큰 바위가 우뚝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바위를 멀리서 보면 마치 부엉이 형상을 하였다 하여 부엉바위라 한 것이 봉바위로 어원이 변한 듯 하다.
또한 봉우리를 이룬 바위라 하여 봉바위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이 되기도 한다.

안터골

안터골을 삼태가 안처럼 아늑하게 보이는 마을인데 이곳을 안터라 하였다.

송정골

송정골은 지금의 약수빌라가 있는 자리이다. 이곳 골자기에는 해방후 까징 잘생긴 노송이 많이 있어 밭에서 있하던 마을사람들이 정자로 삼아 쉼터로 이용했기 때문에 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말바위굴청

‘말바위’는 큰 바위란 뜻이고 ‘굴청’은 고랑이나 골짜기를 뜻한다. 지금의 약수빌라 뒤 골짜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바위를 보고 말바위라 한다.
또한 이곳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떠들면 말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산울림이 되는데, 이 되울림 소리가 바위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는지 바위가 말을 한다고 여겨 이 바위를 말바위라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서냥댕이

풍산동과 경계지점인 지금의 덕풍파출소가 있는 고개마루턱에 성황신을 모신 당나무가 있었다.
이곳을 가리켜 서냥댕이라 하는데 성황당과 같은 뜻이다.

범 재

이 고개에서 호랑이가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주택은행과 국민은행 사이에 있는 고개의 옛 이름이다.

진모루

국민은행이 있는 범고개부터 천주교 성당과 엘칸토까지 뻗은 얕은 산자락 밑의 마을을 ‘진모루’라 한다.
길다는 의미를 가진 경기도 사투리‘진’과 산자락 또는 모퉁이라는 뜻의 ‘모루’가 함께 쓰여 긴 산자락에 있는 마을을 뜻하며,
긴산자락-긴모루-진모루 가 된 것으로 보인다.

흙새기

현재 덕풍3동 주민센터 앞쪽 초원연립 부근으로서, 장마때 수리골 산에서 밀려온 토사가 수로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흙을 쌓아 모래방죽을 설치하였다는 뜻의 흙쌓이-흙쌔기-흙새기로 변하였다고 한다.

한배미뚝

‘나룰’은 들녘에 둘러싸인 마을을 뜻하는 ‘나리울’의 준말이다. 이 말은 나래틀 또는 나틀이라는 이름에서 기인하였스며 나래질을 해놓은 것처럼 평평한 뜰을 의미한다.

*방죽뜰
나룰 가기전의 넓은 들판으로서, 광주수리조합의 수리시설을 이용한다.

*왕바위산
정산에 아주 큰 바위가 있는 나룰 마을 뒤 야산이다. 이 왕바위산에는 나룰 마을 초입에서도 눈에 띄는 쌍바위가 있었다고한다. 두 개의 바위 중 하나가 장마 때 소실되어 지금은 한 개 만이 남아있다.

*월호
이화산업 5공장과 강변도로에 근접한 마을로서, 장마철이면 샛강의 물이 넘쳐 마을입구에 늪지가 생겨 물이 빠진 뒤에도 ‘달모양의 깊은 호수’가 생긴다고 하여 ‘나리월’이라 불리다 한자 표기인 월호로 불리었다고 한다.

*옥다리
나룰 서쪽의 마을이며, 광주수리조합에서 놓은 다리가 굽어 휘어진 것을 보고 ‘옥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골안
덕풍 파출소에서 나룰로 넘어가는 산의 안쪽 마을로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하여 ‘골안’이라한다.

나 룰

미사리 조정경기장 건너편 들판에 위치한 마을이며, 방풍림을 조성하여 바람을 막고 있다 하여 방풍마을-방풍이-방탱이로 불리었다.

풍산동

행정구역 조정 당시에 덕품리의 방아다리 온천마을 일부와 황산을 합하여 이루어진 명칭으로 덕풍의 풍자와 황산의 산자를 합쳐 풍산리가 되었다.

더너물

더너물은 온전마을이라 하던 것이 지금은 온천마을로 불리고 있다. 더너물은 더운 샘물이 나는 곳을 일컬어 부르게 된 지명이라 볼 수 있다.
더운물-던물-더너물 또는 데운물-데누물- 되너 물- 더너물이 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 마을은 겨울에도 더운물이 샘솟아 얼음이 얼지 않는다고 한다.

건너말

더너물에서 지금의 주유소 쪽으로 넘어오다 보면 마을이 있다.
그 외에 복우니골.안산너머.뒷골.한다리 등이 있다.

방아다리

방아다리 마을은 덕풍파출소에서 고개를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이 방앗간이 있엇고 그 앞에는 실개천이 흘러 작은 다리를 놓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방아다리라고 불려지게되었다.

앞말: 앞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해물: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나왔던 곳이다.
용수정: 일제 때 농수용으로 쓰기 위해서 파놓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외에 서냥댕이고개.다리목등이 있다.

고개너머말

방아다리 한진식품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교회가 하나 보이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고개너머 마을이라 한다.
이 마을에서 더너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하는데, 이 고개는 상여가 절대 넘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혹연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황 산

황산은 서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거친뫼’ 라는 뜻을 가진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장승고개 또는 장수고개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가나안신용협동조합.하남농업협동조합 황산지소.풍산동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철광이 채굴되기도 하였으나, 경제성 때문에 폐광되었다고 한다. 밀양박씨의 집성촌이다.

상 망

망월동의 위쪽지역을 상망이라한다. 이 마을에는 이화산업 벽돌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하남고등학교가 있다. 남양홍씨의 집성촌이다.
그 외 강매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하 망

하망은 상망의 하루에 위치한 마을로서 서울시 강동구 하일동과 길 하나를 경계로 한 전형적인 농촌이다. 예전에 이화산업 벽돌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공장에 다니는 회사원과 그 가족들이 이주해 와 인구가 크게 늘어난 마을이다. 광주 이씨의 집성촌이다. 선동 쪽으로 가다보면 농지개량조합 용수선 옆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화산업 공장사 택이 있는 마을이다.

구 산

구산은 마을 뒷산이 거북이의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이름이다. 천주교 구산성지가 있으며, 한국산업은행 연수원이 있다.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장수동

장수구렁이라고 하던 이 마을은 광주수리조합이 생기면서 큰 둑을 쌓고 수로를 길게 설치하면서 농수로가 있는 마을 즉, 긴 물줄기라 하여 긴 장 자와 물 수 자를 써서 장수마을이라 불렀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은 장수(長水)보다는 장수(長壽)라는 뜻으로 그 염원을 담아 장수동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망월초등학교가 있다.

신미사촌 : 1972년 장마 때 미사리가 완전 침수되자 경기도는 이곳을 상습수해지역으로 지정하였고, 80여 세대의 이주 주택이 지어져 형성된 마을로서 신미사촌이라 했다.

미사동

미사동은 아름다운 물결과 모래로 이루어진 섬이라 해서 미사리라 하는데, 예전에는 당정섬과 둔지섬까지도 연결되었던 큰 섬의 중심부였다고 한다. 을축년(1925)홍수로 인해 지형이 바뀌어 각각 섬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퇴적토로 이루어졌으며,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으며,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한 조정경기장이 건설되었고, 인근에 카페촌이 형성되어 서울 근교의 명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다.웃말 : 마을에서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중간말 : 마을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다.
아랫말 : 마을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뒷말 : 강변쪽에 있는 마을을 뒷말이라 했다.
그 외에 광대골.글갈이.대추말.찬우물.창끝.여금맥이.돌뎀이.천황섬.웃다리.아랫다리.늠늠이.xx묘이.진밭.절터.고아원 등이 있다.

선 동

선동은 광주수리조합 용수간성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서 예전에는 동부면 둔지리였다.
둔지섬은 당정섬과 미사동이 이어져 큰 섬을 이룰 때 하류지역의 마을이었다.
1925년 이전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당정섬과 미사동 사람들이 둔지섬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배 선 자를 따서 선리라 하였다. 담양전씨의 집성촌이다.

둔 지

둔지섬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섬이 퇴적토이기 때문에 토심이 깊고 부식토라 농사도 잘 되었다.
또 강이 있어 고기잡이 하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정박하기에 좋아서 광주관아로 운반되는 군량미 등을 이곳에 하역하여 다시 육로로 운반하였다.
이렇듯 포구역할을 하던 이곳에 자연히 장사꾼이 모이고 장이 서게 되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모일 둔 자를 써서 둔지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2년 홍수에 의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그 외 미음나루는 강 건너편에 있어야 하는데 지도상에 잘못 기재 되어진 것 같다.

가무나리

이 마을에는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우물이 있다. 이 샘우물을 황새우물 도는 감천이라고 하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고 한다.
따라서 달 감 자를 써서 감물이라 했으며, 당연히 감물이 있는 논들을 감물나리라 부르게 되었고,
감물나리-가물나리-가무나리의 어원변화에 의해 마을의 지명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밀양 박씨와 광주 안씨의 집성촌이다.

안 골 :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안골이라 한다.
샘 밖 골 : 샘밖골은 심밖골이라 부르고 있다. 샘이 전혀나지 않는 곳이라 샘밖의 마을이라 하는 말도 있다. 이곳에는 이종생의 묘가 있다.
횟걸마루 : 이곳은 석회석이 많이 나던 곳으로,석회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으며 생석회를 만드는 곳이었다.
윗 말 : 안촌을 부르는 말이다.

안 촌

안촌은 가무나리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 안씨의 집성촌이므로 안촌이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매 봉 재 : 산의 형상이 매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황새우물 : 암물,숫물 2곳의 샘우물을 말한다. 현재 암물은 있으나 숫물은 메워졌다 이 두우물을 보고 감천이라고 한다. 또한 물이 검푸르다 하여 검을 현 자를 써서 현천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고 낙 골 : 골이 깊고 짧은 골짜기이며 이곳에서 매를 길렀었다는 말이 있다.
아 랫 말 : 가무나리를 이르는 명칭이다.
그 외에 사당골.서낭당.수눅골.몽골.안경자리.안산.다리목자리.뒷골.우묵골 등이 있다.

갈 미

갈미마을은 감천리의 아래쪽 즉, 꼬리부분에 위치하였다 하여 감미마을이라고 불리던 것이 갈미로 변했다고 ‘하남의 역사’에 나와있다.
갈미는 칡‘갈’자와 쌀 미 자를 쓴다고하는사람도 있는데, 이 마을의 땅은 가뭄에도 경작할 수 있을 만큼 비옥하여 쌀의 질이 상품이었다고 하여 생긴지명이라 볼 수 있다. 칡‘갈’자에 꼬리‘미’자로 쓴다는 사람도 있다. 이 마을 석니골 사이의 산에는 오래된 수호목인 영서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고사되어 없어졌다.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다.

양지말 : 햇빛이 잘드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응달말(건너말) : 양지말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서 응달이 지는 마을이다.
넘 말 :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두리봉 : 두리봉에 올라보면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는 바위가 있다고 한다. 광암동 너븐바위와 연관된 전설이 있다고 하나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숫 산 : 이 산에는 옛날에 망부석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망부석이 바라보고 있는 마을의 부녀자들은 바람이 난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이 망부석을 쓰러뜨려 놓았는데 세워 놓으면 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어느 해인가 이 망부석은 없어 졌다.
그 외에 석니골.갈미골,사래고개,갈미고개 등이 있다.

배다리

‘하남의 역사’에서는 배다리를 밝달-밝다-배달이라고 하여 신성시 되던 곳이라고 하며, ‘경기도 지명유래집’에서는 여러개의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는 데에서 배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판교~구리간 중부고속도로의 서하남인터체인지가 있다. 은진 송씨의 집성촌이다.

행길가

감북동사무소가 있고,서부초등학교가 있는 마을로 길가에 마을이 있다 해서 행길께 또는 행길가라고 부른다.

새마을

피난시정 정착한 마을로서 신촌이라하던 것을 우리말로 고쳐서 새마을이라한다.